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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9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완만한 산, 난과 분재를 키울수 있는 검붉은 돌인 송이가 많이 널려있다.
산방산(395m)의 남쪽, 가파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바닷가에 불끈 솟은 산이 송악산입니다.

흔히들 제주에서 일출하면 생각하시는 장소가 성산일출봉을 떠올리시는데요. 이곳 송악산에서 바라보는 일출또한 그에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흔치않게 제주에서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수 있는 곳이며 가파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바닷가에 불끈 솟은 산이 송악산입니다. 1박2일의 가파도편 촬영 장소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 제주에 오신 관광객이라면 한번쯤 꼭 들러 가시는 유명관광지입니다. 99개의 작은 봉우리가 모여 일명 99봉이라고도 하며, 본 잠수함과 송악산 사이의 해안도로는 제주최고의 풍경으로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서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송악산은 한라산처럼 웅장하거나 산방산처럼 경치가 빼어나지는 않습니다만 송악산 정상에 오르면?누구나 감탄사를 토해낼만큼 주변풍광이 좋습니다.앞으로 가까이 보이는 최남단의 마라도와 가파도, 형제섬, 우뚝 솟은 산방산, 멀리 보이는 한라산, 그리고 끝없는 태평양, 바다를 씻겨온 바람과 능선에 이어지는 푸른 잔디의 풋풋한 감촉 때문이며 그 모양새가 다른 화산들과는 달리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봉의 높이는 해발 104m. 이 주봉을 중심으로 하여 서북쪽은 넓고 평평한 초원 지대이고 서너 개의 봉우리가 있습니다.주봉에는 둘레 500m, 깊이 80m 정도되는 분화구가 있는데 그 속에는 아직도 검붉은 화산재가 남아 있습니다.

송악산을 내려오면 SBS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세트장이 초입에 자리하고 있으며 바닷가로 내려가면 일제시대 해안진지동굴인 일오동굴로 이어집니다.
일오동굴
제주올레 10코스의 절정지점인 송악산 해안절벽에는 15개의 인공동굴이 뚫려있는데, 너비 3-4m, 길이 20여m에 이르는 이 굴들은 성산일출봉 주변의 인공동굴처럼 어뢰정을 숨겨놓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던 곳입니다.

제주도(濟州島)에 남아있는 많은 일제 침탈의 현장. 이 해안지역만이 아니라 도내 중산간지역에도 각종 토치카시설과 주둔했던 흔적이 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 수십만명이 희생된 오키나와. 연합군이 만일 오키나와로 상륙하지 않고 제주도(濟州島)로 상륙했다면 일본군은 아마도 제주 섬사람들을 볼모로 오키나와처럼 옥쇄지역으로 삼았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름다운 제주도(濟州島) 곳곳에 남은 전쟁의 찌꺼기. 한반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한국내 최대의 일제시대 군사유적지인 것입니다. 아름다운 제주의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비운의 흔적입니다.

MBC드라마 대장금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제주올레/송악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다녀가시는 곳입니다. 단순한 굴이 아닌 인공으로 만들어진 동굴의 의미를 알고 보신다면 좋을거라 보여집니다.
형제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섬 2개가 사람의 모습처럼 형과 아우가 마주보고 있는 모습.

사계리 포구에서 남쪽으로 약 1.5㎞ 떨어진 지점에 있다. 바다 한가운데 바위처럼 보이는 크고 작은 섬 2개가 사람의 형과 아우처럼 마주보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에 잠겨 있다가 썰물 때면 모습을 드러내는 갯바위들이 있어 보는 방향에 따라 3~8개로 섬의 개수와 모양이 달라져 보인다.

봄철에 북상하는 난류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기 때문에 5~7월이면 몰려드는 감성돔과 벵에돔을 잡으려는 낚시꾼으로 붐빈다. 평균 수심은 15m로 최대 20m를 넘지 않으며, 깨끗한 바닷물에 다양한 어류와 각양각색의 수중 생물이 살고 있어 스킨다이빙을 즐기려는 다이버들이 많이 찾아온다. 주변에 송악산, 하모해수욕장, 가파도, 마라도 등 관광지가 많이 있다. 찾아가려면 정기도항선이 다니지 않기 때문에 모슬포나 사계리 포구에서 어선을 세내어 15분 쯤 가면 된다.
산방산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安德面) 사계리(沙溪里) 해안에 있는 종상화산(鐘狀火山).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높이는 395m로 중턱에 길이 10m, 높이 5m, 너비 5m의 천연굴이 있으며 이를 산방굴이라 불리웠으며 안에 불상을 안치하고 있어 산방굴사로도 불립니다.고려의 승려 혜일이 자신을 산방법승 이라 하고 이곳에서 수도하다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굴 내부는 석벽처럼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천장 암벽에서는 사시사철 눈물처럼 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데 이는 산방산 암벽을 지키는 산방덕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라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산방덕이의 전설은 산방산에는 예전부터 산신이 살고 있었는데 산방덕이라는 예쁘고 착한딸이 있었습니다. 그딸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싶어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졸랐고 아버지는 만약 사람이 된걸 후회하거든 언제든 돌아오라며 허락해 주었습니다.

당시 이곳에는 고승이라는 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의롭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습니다. 고승은 이웃의 일도 도와주며 부모의 효성또한 지극하니 사람들의 칭찬이 침이 마를정도였지만 정작 맞는 베필을 구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어느날 고승이 봄농사를 짓기위해 밭으로 가던중 갑자기 벼락치는 소리가 들려 산방산옆 큰바위에 가보니 아름다운 아가씨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가씨를 업고 집으로 돌아온 후 그녀를 간호하게 되면서 둘은 사랑에 빠졋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중 대정고을 사또가 말을타고 이 마을을 지나던중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산방덕이를 보고 그 미모에 반하여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고승을 모함하여 옥에 가두었고 자신 때문에 남편이 죽을 지경에 놓이자 그녀는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고자 산방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산방덕이를 잡으려던 포졸들이 산방덕이가 도망친걸 알고 그녀를 뒤쫒았을때 산방덕이는 아버지 살려주세요 라고 소리를 지르자 하늘에서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산방덕이는 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돌이된 산방덕이는 고승이 자신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것을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이 눈물이 산방굴사 동굴천정까지 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굴 밖에 서 있는 노송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일출과 용머리해안 형제섬 가파도 마라도의 모습은 절경을 이루어 영주십경의 하나로 꼽히며 예로부터 수도승들의 수도처로 이용되었습니다. 주변의 암벽에는 풍란, 석곡, 등과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유일하게 섬회양목이 자생하고 있어 산방산 암벽 식물지대가 천연기념물 제37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산방굴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있는 사찰.
산방산 중턱에 있는 동굴형태의 신비함이 있다.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방산(395m)의 서남쪽 해발고도 200m 지점에 있는 길이 10m, 높이 5m, 너비 5m의 천연석굴로 원래는 산방굴(山房窟)인데 안에 불상을 안치하고 있어 사찰로 불린다.

고려의 승려 혜일(慧日)이 자신을 산방법승(山房法僧)이라 하고 이곳에서 수도하다 입적하였다고 한다. 굴 내부는 석벽처럼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천장 암벽에서는 사시사철 눈물처럼 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데 이는 산방산 암벽을 지키는 산방덕(山房德) 여신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라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굴 밖에 서 있는 노송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일출과 용머리해안, 형제섬, 가파도, 마라도의 모습은 절경을 이루어 영주십이경(瀛洲十二景)의 하나로 꼽히며 예로부터 수도승들의 수도처로 이용되었다. 주변의 암벽에는 풍란, 석곡, 지네발란 등과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유일하게 섬회양목이 자생하고 있어 산방산 암벽 식물지대가 천연기념물 제376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머리 해안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있는 해안.
현재 제주올래길과 연결되어 있어, 올래길을 걷는 올래군의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MBC드라마 “추노”촬영지로 기암괴석과 시원한 바람의 경치가 빼어나 산방산과 함께 최고의 절경을 자랑합니다.

산방산 아래 해안가에 있으며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용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겉으로 보면 평범하지만 좁은 통로를 따라 바닷가로 내려가면 수천만년 동안 층층이 쌓인 사암층 암벽이 나옵니다.

180만년전 수중폭발로 형성된 화산력 응회암층으로 길이 600미터 높이 20미터의 현무암력에 수평층리 풍화혈 돌게구멍 해식동굴 수직절리단애 소단층명 등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룹니다. 해안 오른쪽에는 반원형으로 부드러운 검은모래사장이 펼쳐쳐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제주도에서 장차 왕이 태어날것을 안 중국 진의 시황제가 호종단을 보내 제주특별자치도의 혈을 끊으라 하여 호종단은 이곳에서 왕후지지의 혈맥을 찾아내 용의 꼬리와 잔등부분을 칼로 내리쳐 끊자 시뻘건 피가 솟아 주변을 물들이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임무를 마친 호종단은 차귀도를 통해 배를 타고 나가려다 한라산 신의 노여움을 받아 태풍에 목숨을 잃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에 1653년 하멜이 탄 선박이 난파되어 이곳에 표착했던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하멜표류기념비가 있는데 이는 1980년 한국국제 문화협회와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이 공동으로 세운것입니다.
하멜상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선원으로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했다.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은 1630년 네덜란드 호르큼(Gorcum)이라는 도시에서 출생하였다. 호르큼은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라인강의 지류인 왈강이 네덜란드 운하와 연결되어 있어 곡물을 운반하는 선박의 왕래가 잦았으며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하멜의 가족은 대대로 호르쿰에서 살았다. 16세기 네덜란드는 해외무역이 발달하였으며 중국, 일본, 오세아니아, 아메리카에 걸쳐 해상무역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해상무역을 배경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헨드릭 하멜은 165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취업하였고 선박의 포수(砲手)로 바타비아(Batavia:현재의 자카르타)에 건너갔다. 당시 바타비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사가 있었으며 동양의 향신료와 중국과 일본의 청화백자를 가져다가 유럽에 되팔아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하멜은 이곳에서 근무하며 서기(書記)가 되었다.

1653년(효종 4) 7월 하멜은 상선 스페르웨르(Sperwer) 호를 타고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게 되었는데 도중 태풍을 만나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漂着)하였다. 당시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에게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박연(朴燕, 네덜란드 이름 얀 얀스 벨테브레 Jan Janse Weltevree)이 서울에서 내려와 통역을 하였고 이들의 소속과 정체가 파악되었다. 하멜 일행은 제주도에서 탈출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였고 10개월 동안 감금되었다가 이듬해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 소속되었다. 하멜은 북벌정책을 추진하였던 효종을 알현하였는데 이때 일본으로 송환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었다.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자 이들을 찾아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탈출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가 이런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될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결국 1656년 3월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어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에 소속되었다. 이곳에서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잡역에 종사하였으며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생활은 궁핍하여 먹을거리를 구걸을 하기도 하였다. 1660년에 전라병영에 부임한 절도사 구문치는 하멜 일행에게 비교적 관대하여 이들에게 집과 텃밭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7년 동안 전라병영성 근처 초가집에 머물렀다. 1663년(현종 4) 흉년이 들자 하멜의 일행은 남원에 5명, 순천에 5명, 여수(麗水)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12명이 분산되어 배치되었다. 하멜은 여수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었고 고된 노역과 생활고에 지쳐 탈출을 결심하였다. 1666년(현종 7) 7명의 동료와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하여 일본 히라도(平戶)로 건너가서 나가사키(長崎)로 갔다.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商館)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일본 바쿠후에도 전해져 조선에 남아있는 네덜란드 선원들의 석방교섭이 진행되었다. 1667년 석방 교섭이 완료되어 조선에 남아있던 동료도 모두 석방되었고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조국으로 돌아간 하멜은 그해에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 및 부록 《조선국기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ee》, 국내에서는《하멜표류기(漂流記)》로 알려진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의 억류생활 14년간의 기록으로서 한국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하멜 표보고서》는 자신과 동료가 조선에 억류되어 14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가 출판되자 네덜란드와 유럽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이 유럽에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당시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 직접 교역을 위해 1000톤 급의 선박인 코레아 호를 건조하였으나 일본 바쿠후의 반대로 코레아 호는 조선으로 항해하지 못했다. 하멜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1692년 2월 12일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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